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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의 복귀

일상다반사

by 자전거여행자 2012. 1. 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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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고작 기계 따위가 작동이 되지 않는데도 나는 갑자기 견딜 수 없는 고립감을 느꼈다.

명절에 이런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줄 가게가 있을리 만무했다. 일가친척들에게는 고백하지 않았지만 만약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된 아침이었다면 나는 본가행 자전거에 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몸의 끝단을 얼어붙게 만드는 칼바람의 고통을 이겨내고 본가에 기어들어가 비로소 혼자라는 느낌에서 해방되었다.


사랑의 총량을 근수로 잴 수는 없겠으나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에는 형님과 자형이 나를 사랑하는 무게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무거운 것 같다. 특히 작은 형님은 그 무게에 값하는 술을 내잔에 따뤄주었다. 사랑은 가슴에 쌓이지만 알콜의 

기운은 머리에 축적되어 그 다음날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아, 이제 내 몸은 더이상 술을 이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거였다. 설날 이후 오일째 금주를 하고 있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설날에 잘한 일이 있다면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연 것이다. 특히 세배돈을 받아든 조카들의 표정이 몹시 밝아 보기에 좋았다.

절도 받지 않고 공부,진로,연애 기타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돈만 주었다.


그들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내내 웃었다.



남들에게 드러내기에는 부끄러운 공간이지만 그래도 오래살아 익숙하다보니 일상을 영위하는 이곳이 심리적으로 더 편안하다.

일상으로 복귀한 첫날, 없는 살림에 큰맘 먹고 출퇴근용 자전거를 정초에 사러온 손님이 있어 나를 기쁘게 하였다. 도서관 가다가 

찾아온 상오와 칼국수를 먹으며 반나절을 수다 떨며 놀았는데 이 또한 재미진 일이었다.


이런 행복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날이 풀린 겨울 오후, 오랜만에 뒷산 여기저기를 자전거로 누비고 다녔다. 숲의 고요속에 약간 기가 죽었다가 느닷없이 만난

수빙(水氷)의 빛남은 감격스러웠다.


오래 기억될 겨울이었다.







자전거의 방향을 사상성당쪽으로 돌렸다. 재래시장이 재래의 방식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었다. 재래는 근래를 이기지 못하고

수세식에는 더더군다나 힘을 쓰지 못하는 법이다. 이 문장은 개그다.


사람의 사는 방식이 바뀌니 재래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재래시장은 재래를 기억하는 사람 몇몇과 수세식을 받아들일 형편이

안되는 몇몇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할머니 설 잘 쉬었습니꺼.


사십년 전통 함안통닭 안주인이 재래식 할머니께 설인사를 하였다. 허리가 꼬부러져 수세식으로의 전환이 절실할 것 같은

할머니의 답이 걸작이다.


- 쉬기는 뭘 쉬어? 내가 일했나, 쉬게... 설은 쇠는 거야. 쉬는 게 아니고.


동네 사랑방 역할까지 하고 있는 통닭집의 아낙네들이 할머니 우습다고 까르르 자지러진다.



컴퓨터는 고쳤다. 근처 가게에 사람을 불러 수리를 맡겼는데 본체 내부에 먼지가 많아 기억장치들이 인식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먼지만 제거하고 다시 전원을 올리니 정상작동하는 기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술담배하는 재미에 빠져있는 컴퓨터 수리점

알바 아이는 한사코 수리비 받기를 거부했다.


나는 사장님에게는 비밀로 할 터이니 밤에 저녁이라도 사먹으라고 알바 아이 주머니에다 몇만원을 찔러주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이 재래식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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