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인생계획, 이장욱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한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남극의 눈물]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시다. 존재자체가 펭귄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운 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이대로라면 지구와 그 구성원 전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거세하고 소규모로 살며 펭귄과 북극곰의 사정까지 살피는 삶이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위대한 자들이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사는 소규모 인생들의 소박한 밥그릇마저 차버릴 기세니까.
해서 욱하는 마음에 허랑방탕한 삶을 꿈꾸다가도 시인의 언어에 다시 귀기울이게 되는 밤이다. 정말 소규모로
인생계획을 세우면 인생은 간소해질 것이며 도시가 달콤하게 부풀어 오를까?
나는 이미 식빵가루에 질려있고 지나친 죄의식도 허영이라는 어떤이의 주장이 더 마음에 와닿는데...
따르릉...
전화가 왔다. 슈퍼하는 성씨가 최고급 삼겹살을 준비해 두었으니 같이 소주 한 잔 하자는 거였다. 시와는 상반되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결론은 나중에 내리기로 하고 나는 밤마실을 나선다. 그러다 혼잣말을 한다.
- 이 이상 더 어떻게 인생이 소규모일 수 있을지.
인생은 뭐 그렇다치고 찬바람 부는 가게 바깥으로 나서는데, 삼겹살 먹을 생각 때문인지 동네가 기름에 튀겨져 느끼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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