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개의 미덕은 주인에게 한결같이 충실하다는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자기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후다닥 달려와
주인에게 안기려 발버둥 치는 개의 맑은 눈망울을 보고 싫다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몸의 언어를 질색하는 사람이 가끔있는데
나같이 어릴적 개에게 된통 당한 사람이 그렇다.
안좋은 기억 때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개를 한 번 키워보라고 해도 선뜻 내키지는 않을 것 같다. 관계와 대상에게 한결같이 충실한
개의 미덕이 내게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나 하나만 바라보고 내 주변만 빙빙 돌며 내게만 충실한 개에게 나도 그에 값하는
애정과 관심을 줄 자신이 없다.
반려동물이라는 신조어를 나는 썩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유는 그 단어가 사람에 대한 불신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듯해서이다.
동물에게 쏟아부을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을 테니 동물 따위와 반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개를 비롯한 여타 동물을 키우지 않는 것이 좋다. 개 고생 시킨다.
2. 기타
개를 키우기에 적당한 성품이 아닌 나의 선택은 기타다. 기타등등의 기타가 아니라 악기 기타. 무생물이지만 나름의 언어를 가진 물건이다.
손가락에 의해 튕겨진 소리가 울림통 내부로 빨려들어가 내부에서 서로 부딪쳐 더 크게 증폭된 소리로 다시 빠져나오게 되어있다.
개방현 여섯과 각각의 지판을 짚을 때 나는 소리가 126개이고 손가락의 놀림에 따라 무수한 조합이 이뤄지니 수를 정확히 헤아리기 힘든
언어다.
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확하게 내가 수행한 정도에만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잘치든 못치든 좋은 소리든 나쁜 소리든...
기타의 언어엔 거짓이나 원망이나 후회가 없어서 좋다. 도, 는 정확히 [도]이고 레, 는 내 손가락이 잘못 짚지 않는한 정확하게 [레]다.
이 약속에는 배신이 있을 수 없고 모든 결과의 책임은 나에게로 귀속된다.
그런 이유로 이 성격 선명한 악기 앞에서 나는 제법 편안함을 느낀다. 다만 친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단점이다.
한 십년 쯤 후엔 내 기타가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싶다.
손가락을 놀릴 힘이 남아 있는 한 기타와의 관계를 지속할 생각이니 미래는 나쁘지 않다.
3. 선인장
세상을 좀 편하게 살려면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개와 기타의 중간쯤이 선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처럼 바쁘지도 않고
기타처럼 무심하지도 않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선인장]의 가사를 떠올려보면 더 그렇다.
사람이 사람에게 선인장 정도의 자리만 지킬 수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
봄에 날 풀리면 선인장 구경을 가야겠다.
그럼.
선인장
- 에피톤 프로젝트
햇볕이 잘 드는 그 어느 곳이든
잘 놓아두고서 한 달에 한번만
잊지 말아줘, 물은 모자란 듯 하게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하지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게
그 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 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서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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