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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탔다

자전거 탄 풍경

by 자전거여행자 2011. 9. 2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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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탔다. 여인숙이 낯설지 않은 중소도시의 차부에 내렸다. 십여년 전 우연히 들렀다가 홀딱 반한

그 길이 그리워서였다.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고례골짝, 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궁벽지면 지명 뒤에 골짜기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았을까 싶지만, 이제 새로운 길이 생겨 오지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곳이 되어있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모르는 길을 두려워해본 적이 별로 없다. 모르는 길은 새로운 풍경을 툭하고 나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제한속도 시속 30킬로미터.


급할 것 없고 느리디 느린 나와 자전거에겐 더없이 반가운 표지판이다.




시골 작은 우체국 앞에서 쉬었다. 작은 상점에서 콜라를 사들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 엽서를 보내고픈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휴일이 아니었다면, 가방에 붓이 있었더라면 나는 엽서를 썼을 거다.


아,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지인들의 주소를 모르고 있었구나.


삶과 그 속에서 맺게된 인연들 사이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우정, 신뢰, 진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소...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사가 떠올랐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저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나와 자전거는 표충사 방면으로 느릿느릿 노새의 걸음걸이로 천천히 나아갔다. 

기억속의 그 길 고례골짝은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요즘 틈만나면 흥얼거리는 노래를 부르며 페달을 밟았다.


툭툭 털자

  별일 아닐꺼야
  그냥 웃고나면 결국 같은 하루일 뿐
  길가에 돌멩이를 차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넘기자
  이젠 가자 버스를 잡아야지







아...


또 한해의 계절이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내용과 형식을 충실히 갖춘 이 이별 앞에서 나는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섭섭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연의 방식에 낮은 신음으로 경의를 표하고야 말았다.


만남이 우연이라면 멀어짐에 있어서는 내용과 형식을 더욱 충실히 갖춰 마음속에 무의미한 앙금을 남겨서는 안될 일이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할 거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지만.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라 고요한 인공호수를 내내 바라보았다. 마음이 저 고요를 닮았으면 싶었다. 

그러고보니 자전거와 나는 지치지 않고 높은 산을 하나 넘은 거였다. 

낡고 흠집투성이의 자전거는 앞으로 더 길고 더 먼길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가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자전거에 의지해 비스듬히 서있는 내 곁을 예리하게 스쳐지나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는 바람의 꽁무니를 쫒아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처는 집이 아니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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