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은 웃을 지도 모르겠으나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길이 그립거나 길이 고플 때가 있다.
그립고 고팠던 마음속의 길 운문사 가는 길을 벼르고 벼르다 나섰다.
부산-김해-삼랑진-밀양-유천-매전-운문-운문사-언양-양산-부산
경북과 경남 그리고 부산을 아우르는 둘레 길이다. 빙 둘러 가는 이유는 유천에서 매전을 지나 운문사까지의
길이 몹시 아름답기 때문이다.
밀양시청을 지나 경부선 유천역을 향해 청도방면으로 가는 길이 정확한 길이다. 작은 시골역 유천에서 매전 가는 이정표를
반드시 확인해야 시간도 단축될 뿐더라 더 좋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매전은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한 방도가 없는 곳이다. 물과 산이 그렇고 사람들의 마음씨도
닮아서인지 낡고 희미한 간판이 범죄 없는 마을임을 알린다.
맑고 깨끗한 지역 매전의 농산물들은 믿음이 간다. 대추, 딸기, 곳감...
너무 오랜만에 찾아간 길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고불고불하던 길이 넓어지면서 노변의 감나무들이 사라졌고
그 예전 후줄근한 복장의 자전거 여행자를 반기던 할머니의 작은 상점도 온데간데 없다.
청춘의 이글거리던 분노를 길에다 패대기 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썩 평화롭지는 않지만 그때 12단짜리
고물 철자전거가 지금의 27단 산악자전거로 바뀐만큼은 변화가 있다.
길도 나도 나의 자전거도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거의 외길이라 이정표만 잘 확인하면 길을 잃을 가능성은 없다. 대구지역 식수원 확보를 위해 운문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지역 사람들을 위해 마을이 새로 조성되었는데 그곳이 운문이다. 운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경주 가는 길이고
오른쪽 운문댐을 끼고 올라가는 길이 운문사 가는 길이다.
댐의 상류에는 겨울이라 가물어서 물에 잠겨 있던 예전 신원리 마을이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다. 누런 토사를
뒤집어 쓰고 있는 다리며 길이 사람의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이라 마음이 급해져 사진으로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거대한 호수의 끝이 보이는 지점에 가까워지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오른쪽이 운문사가는 길이고 왼쪽이 언양가는 고갯길의
시작 지점이다. 운문사에 들렀다가 되돌아나와 달려야하는 길인데 해지기 전 산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금이야 도로가 잘 정비되어서 접근이 비교적 쉽다. 그러나 그 예전에 이곳은 오지중에
오지에 속한다.
산을 몇구비 내를 얼마나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인지 현대인으로선 가늠조차 잘 안되는 곳인데도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이 이곳까지 당도하여 일제에 항거하였으니 놀랄 일이다.
문명초등학교 앞에는 그날을 기념하여 비석이 서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에 대해 그 규모나 역사적 의의를
폄훼하는 이가 있다면 이 비석을 볼 일이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모르는 사람과는 말을 쉽게 섞지 못하는데, 운문사 매표소 직원분들에게는 쉽게 말을 건넨다.
- 아주머니 운문사에 오고 싶었는데, 몇년만인지 기억도 안나네요. 오년만에 오는 건지 육년만에 오는 건지.
되게 오고 싶었습니다.
- 뭐한다꼬 그래 오랜만에 왔능교? 바빴는갑제? 그때도 자전거 타고 왔어요?
- 예, 뭐 옳게 잘살지도 못했으면서 여기 한 번 오기가 그렇게 어렵대요.
오년전 어떤 날에는 동자승을 닮은 얼굴 벌건 청년이 매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이랬다.
- 아저씨, 내가 운문사만 벌써 세번째인데 오늘은 보너스로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 킥킥...
그랬더니 손을 휘휘하며 그냥 들어가게 해주었다.
개그콘서트를 흉내내어 보면.
[후배들아... 나는 이런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운문사를 공짜로 들어가곤 했다.]
알려진 소나무 길이다. 소나무의 밑둥이 모두 사진처럼 훼손되어 있다. 일제가 전쟁을 한답시고 소나무 송진까지
긁어간 흔적이다. 나무에도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그들의 광기를 전해주고 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그냥 휙하고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길이다. 휴일이어서 차량의 출입이 많아 숲길의 고요와 평화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사진으로는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 그 점도 아쉽다.
자전거 타는 지인들에게 운문사를 추천했다가 좋은 소리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경내에 들어가기 전 이 돌담길도 참 좋은 기억의 장소인데, 다른 사람들은 별 감흥이
없었다는 거였다.
자전거 타는 일이 익스트림하게 속도를 내고 근육과 심폐단련이 목적이라면 이런 류의 자전거 여행은 비추천이다.
아마도 그 차이 때문에 다른 지인들은 별반 좋다는 느낌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피는 계절의 이 짧은 길이 주는 느낌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역시 많이 알려진 운문사 경내의 처진 소나무이다. 소나무 가지가 아래로 쳐져있는 모양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꽃 피는 계절에 운문사에 왔다가 책으로만 읽었던 막걸리 주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한 일이 있다.
주변에 골을 내고 관리인 아저씨가 커다란 막걸리 말통으로 뿌리 주변에 막걸리를 콸콸 쏟아부었다.
고송이라 건강하게 오래 버티라고 그리 한다는 사연이었다.
술이 나무의 건강도 돌보는 기능이 있다니 재미진 일이다.
운문사는 절집보다는 절집과 어울어지는 주변의 산세가 아름다운 것 같다. 비교적 평평하고 넓은 땅에 절집이
자리잡고 그 주변으로 빙 둘러 산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해서 절안에 있으면 괜히 보호받고 있는 느낌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절집에 대한 세세한 상식이 없어 글은 줄이고 사진으로 그 분위기를 대신 전달하고자 한다.
승가대학이 운영되는 곳이다보니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고 있는 곳은 통제구역이다. 비구니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어서
새벽예불 때에는 많은 여성 출가자들이 법당에 모여 일제히 불경을 낭송한다. 그 소리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시간에
맞춰 자전거 타고 온 적도 있다.
자전거 세워두고 법당 모퉁이에 땀을 식히며 쪼그리고 있던 내 모습이 슬쩍 지나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 출가자들의 모습은 무슨 기구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마음에 대단한 상처가 있는 사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면회를 온 출가자들의 가족이나 출가자들의 표정에서도 밝은 웃음을 간간히 확인할 수 있다.
물맛 좋기로 또한 유명한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길을 나선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블로그 배경음악에도 있는 김윤아의 고잉 홈을
내내 흥얼거리며 산을 넘을 작정이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운문사 안녕...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작별을 고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오르막에 접어드니 멀리 운문령이 위압적이게 버티고 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한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삼월이지만 높은 산 계곡에는 아직 잔설과 녹지 않은 얼음이 곳곳에 있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잘 보존하였으면 싶다.
잡목이라고 취급도 잘 안해주던 나무에서 수액을 뽑느라 야단이었다. 자전거 열심히 타서 나중에 나무의 피에게 신세 지는
일이 없어야 겠다.
고개의 막바지 지그재그 형태의 길에서 두손을 들고 말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안장에서 내려 걷는 것만큼
모양새가 떨어지는 일은 잘 없는데, 일단 사람부터 살고 봐야 했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바라보니 멀리 언양이 보인다. 언양 지나 양산... 부산까지...
집으로 가는 길이 정말 까마득하다.
위안이라면 그래도 걱정과는 달리 단시간에 산고개를 넘었다는 것이다.
이른 점심과 양갱 말고는 먹은 것이 없어 언양시장 구석진 단골 국밥집에 들렀다.
기껏해야 계절에 한 번 들르는 손님도 단골이라고 용케 알아보시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시는 밥집
할머니의 웃음이 정겹다.
긴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데 의식만큼은 또렷해져서 길과 운문사의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자전거를 탈 수있는 운동능력이 허락되는 날까지 자전거와 함께 길 위에 있을 거다.
그러고 싶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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