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선생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일컬어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 하였다. (10쪽 15줄 인용)
그 방대한 기록 중에 서간문을 따로 추려서 옮겨 놓은 책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다. 다산의 다른 저술이야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 힘들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글이어서 덜 부담스럽게 접근할 수가 있다.
책장을 몇장 넘기기도 전에 스승과 부친의 사소한 기록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책으로 엮은 다산 선생의 인적자산에 경외심이 들었다.
기록은 힘이 세서 기억을 압도하고 말을 능히 제압하는 법이다. 승자가 되고 싶으면 일단 기록부터 할 일이다.
기록의 힘을 빌어 다산선생은 당시에는 유배지에 갖힌 몰락한 폐족이었을지 모르나 기록으로 부활하여
위대한 승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벼슬길이 막힌 몰락한 가문의 선비는 혹여 자식들이 의기소침할까 끊임없이 소통의 끈을 대고 있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강산이 두번정도 바뀌는 세월을 궁벽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힘을
주변 인물들에게 불어넣고 있으니 과연 범인이 따라가지 못할 영혼의 소유자 다산이다.
아들이 닭을 키운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낸 편지에서 선생이 얼마나 사대부라는 정체성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은데,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있는 것과 비천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농서(農書)를 잘 읽고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보아라. 색깔을 나누어 길러도 보고, 닭이 앉는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더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다. (중략)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낸 뒤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96쪽 5줄 발췌)
사소한 것에도 사대부의 풍모가 깃들기를 바라는 천상 선비의 전형이 다산이다. 이 글은 다른 책에서 7년전에 읽고
실천을 다짐했던 질풍자전거점 운영자인데, 역시 태생이 천출이어서 그런지 영 어렵디 어렵다.
실천하는 대학자의 면모를 연속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인데, 다만 원문 없이 번역문만 있는 것과
번역자의 개인적인 감상의 결여가 흠이라면 흠이었다. 충실한 번역이라면 원저자가 그 글을 쓰게된 동기나 시대상
그리고 번역자 나름의 생각한 바를 기술해서 다른 사람의 책읽기에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러한 아쉬움은 3부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부분에서 더 진하게 느꼈다. 한학에 대해 기본을 넘어서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아무리 편지글이라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형님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글인데 토론의 요점 정도는 설명이 있었으면 싶다.
사족이지만, 둘째형님 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는데 흑산도로 떠나는 죄인을 신지도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눈물로 배웅했다고 하니 난형난제이다.
온열메트에 몸을 의지해 진짜 선비들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이 요즘 질풍자전거점 운영자의 소일거리이다.
이러면서 12월을 견뎌내는 건데, 혹 겨울의 긴긴밤이 지겹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해본다.
단, 치고박는 재미는 단연코 없다. 그런 재미를 기대했다가는 책값만 날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샤갈... 도시 위에서 (0) | 2011.01.13 |
---|---|
자화상... 4년 전 안창마을에서. (0) | 2011.01.04 |
살인의 추억을 추억 (0) | 2010.11.26 |
귀를 기울이면 (0) | 2010.10.29 |
황령산 봉수대의 연인들 (0) | 2010.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