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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령산 봉수대의 연인들

일상다반사

by 자전거여행자 2010. 10. 2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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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은 불꽃축제를 보기 위한 사전답사 목적으로 라이딩을 나섰습니다. 물만골로 해서 황령산

봉수대까지 오르는 길.

 

위험한 야간 도심 라이딩을 거쳐 물만골에서 황령산을 오르니 사람과 차량의 무리가

꾸역꾸역 산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거였습니다. 평일 저녁에 너무 많은 인파라 생각하여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슨 행사가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어이없게도 불꽃축제 전야제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사전답사 나갔는데 본행사가 끝났더라는...

 

부산에 살면서도 불꽃축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작심하고 조금이라도 덜 번잡한 장소를

나름 궁리하여 찾았는데 역시 사람 생각하는 것은 거기서 거기인가 봅니다.

 

전야제 행사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였을 줄은...

 

자전거점 문을 아무리 일찍 닫아도 토요일 본행사에는 발디딜 틈 없겠다는 생각에 올해 불꽃놀이 구경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황령산 봉수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야경은 정말이지 최고입니다.

부산의 여러 지역이 골고루 보이는 곳은 황령산 봉수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꽃놀이 관람객들이

하산을 하고도 쌍쌍의 연인들이 드문드문 올라오더군요.

 

밤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 뿐이어서 연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립니다.

 

봉수대 주변 난간에 다정하게 앉아 야경을 보던 연인들 중 남자가 이럽니다.

 

- 경숙씨 포도가 참 맛있습니다. 아... 이 포도가 참 맛이 있군요. 왜 이렇게 포도가 맛있을까요?

 

부산사람이 표현이 참 서툰데 사랑하는 사람과 그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포도 타령이라니. 질풍자전거점 운영자 찮은씨, 분통이 터집니다. 야! 이양반아 통상의 포도는

맛이 없을 수가 없다고! 당신을 생각해 먹을거리를 준비한 경숙씨의 배려에 감사하는 멘트를 날려야지!

 

모쪼록 경숙씨가 미숙한 남자분의 표현력을 이해해 줘야 할 텐데...

 

 

송신탑을 찍고 있자니 말쑥한 양복 차림에 헤어스타일은 영판 라이언킹의 사자머리를 한 안경잡이가

여자친구를 앞세우고 야경 앞에 섰습니다.

 

바람 한줄기가 라이언킹의 귀밑머리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킹의 여자친구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에서

야경을 보고는 보기 좋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라이언킹 딱 세마디합니다.

 

- 봤나? 됐제? 가자!

 

라이언킹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갑니다. 하이힐의 여친이 어둑신한 길을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걷습니다.  

 

라이언킹!  여친에게 팔짱이라도 빌려줄 것이지. 너, 그러다가 나중에 엄청 후회할 일 생긴다.

딱히 야경때문에 너를 졸랐겠냐? 같이 좋은 구경거리 오래 보고 추억을 쌓고 싶었던 거지.

 

질풍자전거점 찮은씨, 라이언킹이 나이가 들어 종종걸음의 아내가 동창회라도 나가면 심심하다고

빨리 들어오라며 전화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를 느낍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손가락질을 거두는데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찮은씨의

귀를 자극합니다.

 

- 자기야... 까르르르... 자기야 자기야 자기야 까르르르... 자기자기 자기야... 까르르르

 

자기야, 못해서 죽은 귀신이 씌었나? 피 안통할 것 같은 스키니진의 여자가 좋아죽겠는지 남자 주변을 맴돌면서

자기야 타령입니다. 부산남자 이 상황이면 못참습니다. 힙합바지남자가 바로 응징에 들어갑니다. 등짝을 손바닥으로

때립니다.

 

철퍼덕!

 

- 이기 미칬나... 부끄럽구로 와 자꾸 씨부리쌓노.

[통역: 너 제정신이 아닌거 아니니? 다른 사람 보는데 무안하게 왜 계속 그렇게 말하니.]

 

그래도 스키니진은 계속 자기야 타령입니다. 좋아 죽는 상대방에게 조금은 관대해도 괜찮을 텐데.

 

황령산 봉수대에 바람이 세게 지나갑니다.

 

앙상한 나목(裸木)과도 같은 질풍자전거점 찮은씨만 홀로 남아 야경을 오래 보았습니다.

 

남자들의 실루엣이 겹쳐져 찮은씨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착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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