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원래 미션은 복음(Good news)을 폭포 위 야만의 원주민에게 전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 전파의 대상인 원주민들의 야만이 그들 자신의 무분별한 접근에 기인한 것임을
과라니족들과 몸을 부대끼면서 알게 된다.
원주민,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미션을 수행하고자 했던 선교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가 없었을 뿐. 어쩌면 필요에 따라 죽고 죽이는 문명의 세계보다 인디언이라 영화에서 불리는
과라니족 그들이 더 [신의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생을 살해한 용병대장이자 노예사냥꾼인 멘도사는 물론이고 독실한 제수이트 교도(敎徒)
가브리엘 신부 조차 그들과 어울려 사는 일상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전거점
운영자 하찮은씨였다.
불의에 맞서 멘도사는 적극적으로 칼을 들었고 가브리엘은 성체(聖體) 십자가를 들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권력과 명분 세우기 이외에는 힘이 없는 교회권력
그리고 뭔가 변화를 찾던 당시 수도회의 모습을 확인해보면서 영화 속의 인물들이
선택한 길, 순교를 되짚어 보는 찮은씨였다.
원주민 노예를 대하는 국가권력의 말은 아래와 같다.
-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그깟 채찍질 좀 하면 어떤가?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가톨릭 수도회의 기본적인 규율인 순명을 어기고 그들은 모두 원주민 마을의 선교회에
남는다. 멘도사와 같이 기쁘게 총을 들었던 그들은 하나 둘 쓰러지고,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꿈꾸던 멘도사도 흙바닥에 몸을 누인다.
희미해지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멘도사는 가브리엘의 마지막 행보를
확인하는데...
어쨌든 영화는 20년이 지난 것이지만, 우리 현대사와 중첩되면서 문득문득 다시 꺼내보게
되는 거였다.
이 모든 일을 목도한 주교는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
- 그리하여...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오 모리꼬네의 테마음악 넬라 판타지아가 한 석달은 귀에 맴돌 것만 같은 동네
자전거점 운영자 하찮은씨였다.
[예전에 썼다가 지웠던 글인데, 요즘 남자의 자격에서 이 영화의 테마음악을 합창으로 한다네요. 음악도
좋지만 영화도 괜찮아서 다시 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