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우도 가는 길,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오늘 점심때 전국일주여행자님과 연락이 닿았다. 그의 전국일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어서 남도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표류자의 제주표류기에 묘사된 전국일주여행자님은 조금 희화화 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모 중공업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직장인이다.
다만, 표류자의 시선에서 세대가 다르다보니 조금 특이하게 비춰진 모습만 글로 옮겨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는 평균이상으로 예의가 바르고 타인을 배려하는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늘을 봤다. 바람도 전날보다 세게 불었고 하늘은 검은 구름 탓에 무거워보였다.
- 표류자님, 마음 같아선 오늘은 그냥 여관방에서 푹 쉬고 싶네요.
나는 그의 말이 그냥 해보는 소리처럼 들렸다. 만약 우리가 하루쯤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고 종일 뒹굴뒹굴하며 이날을 여관에서 보냈다면
더 좋은 여행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라이딩스타일과 전국일주라는 일정상 머뭇거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아끼는 편이 낫겠다고
혼자 판단했다. 비라도 그냥 뿌렸더라면 그 핑계로 푹 쉬었을 텐데. 나는 우도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면 우리 얼른 우도 들어갔다가 나와서 적당한 숙소에서 쉬도록 합시다. 우도가 배로 십오분 우도 전체 일주길은 약 16킬로미터
정도이니 자전거로는 늦어도 한시간 반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오전에 후딱 다녀오고 오후엔 근처에서 쉬도록 해요.
우리는 짐을 챙겨 부랴부랴 성산항으로 갔다. 성산항에서는 한시간 간격으로 우도행 도항선이 운용되고 있었다. 왕복표를 끊는데 매표직원이
말했다.
- 오늘 바람이 많이 부니까 되도록이면 일찍 나오세요.
표를 끊기 위해서는 일정양식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게되어 있었다. 이 과정이 왜 필요한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전국일주여행자가 다급하게
매표직원에게 물었다.
- 바람이 많이 불면 배가 끊길 수도 있나요?
- 네, 일단 일기예보상으로는 오늘은 괜찮다고 하는데 바다날씨가 예측불가능하니 되도록 빨리 둘러보시고 나오세요.
작은 규모의 카페리 도항선이 주말을 이용한 많은 여행객들을 태우고 배가 성산항을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파도의 위력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갑판까지 치고들어오는 파도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고 좌우로 흔들리는 배는 놀이공원 바이킹의 공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배는 파도를 정면으로 치고 나가 다시 길게 우회하여 우도 천진항으로 향했다. 길은 짧았는데 느껴지는 시간은 길었다.
도보여행자, 자전거여행자, 스쿠터여행자, 관광버스여행자들이 한무더기로 우도에 부려졌다. 배에서 느꼈던 공포와 끊임없이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에도 우리는 우도에서 잠시 자전거를 타고 나가자 이래서 다들 우도 우도 하는 구나 싶었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의 바람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서빈백사 벤치를 만나자 우리는 동시에 멈춰서 바다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가슴이 시원하다 못해 괜히 통쾌했다. 날씨가 좀 도와주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이 벤치에서 반나절을 누워있고 싶었다.
전국일주여행자가 외쳤다.
- 와, 제주 정말 좋네요. 일찍 나서길 잘했어요.
- 그러게요. 일단 빨리 돕시다. 바람이 멈추질 않네요.
나는 이상하게도 이 시점부터 섬에 고립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경치는 좋았으나 배에서 느꼈던 높은 파도의 공포감 때문에
우도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지가 않았다. 표류자의 신분을 망각한 거였다. 그때였다. 뒷자리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우리보다 빨리 앞서가던
스쿠터여행자 커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길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말했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셌다.
- 조금 전에 여객선 터미널에서 연락이 왔는데 삼십분 뒤에 막배가 뜬다네요. 우도에서 잘 것이 아니라면 빨리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랬다. 평소같으면 네시 반까지 배가 운항을 하는데 바람이 더 심해져 바다에 풍랑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것이다. 해서 오늘 마지막배는
일찍 끊어진다는 것이었다. 표를 살 때 작성한 이름과 연락처는 이런 상황일 때 긴급하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스쿠터 커플은 바람을 거슬러 항구쪽으로 떠났다. 나와 전국일주여행자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먼저 설득했다.
- 자전거로 돌면 두시간이면 되는데 그 이후로 섬에서 할 일이 없어요. 그리고 이 파도가 내일이면 잦아든다는 확신도 없고 잘못하면
내일도 고립될 수 있어요. 우리 일단 아쉽지만 막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갑시다. 일단 나가서 다음 일정을 의논합시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전국일주여행자는 많이 아쉬워했다.
- 우도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하루를 그냥 보내더라도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우도를 기약할 수 있겠어요.
- 물론 그렇죠. 내일 바람이 잦아든다는 보장만 있으면 저도 그냥 오늘 우도에서 자겠는데, 내일도 배가 뜨지 않을 경우 너무
긴시간 아닐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갑자기 고립되는 것이 무턱대고 싫어서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붙인
측면도 있었다. 이튿날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그냥 이 시점에서 각자의 갈길을 갔더라면 서로에게 더 좋은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전국일주여행자는 나의 의견을 따랐다. 배에서 내려 삼십분 만에 다시 배를 타고 우도를 빠져나오게
된 것이었다.
나오는 배는 들어갈 때 탄 배보다 한참 작은 배였다.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나 자일로드롭, 바이킹 따위의 놀이기구는 공포스럽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전하게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예측가능한 공포다. 그러나 바다의 공포는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삼사미터
파도로 판단되는데 선미가 바다아래로 푸욱 꺼지면서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푸른 물결이 보이다가 다시 불쑥 위로 솟구치는
불규칙한 움직임은 이러다가 배가 뒤집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런 파도와 생사를 두고 늘 싸우는 뱃사람들에게 어떤 친절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멜은 팔월 일일부터 십오일까지 거센 파도를 경험했다. 십오분거리도 혼비백산하였는데 보름을 비바람에 시달린 그들이 느낀
공포는 어떤 지경이었을까. 그들은 끊임없이 신의 은총을 빌고 또 빌었다.
다시 성산항에 내린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신을 수습하자 전국일주여행자가 카메라의 렌즈캡과 고가의 휴대용 라이트를
분실하였다는 거였다. 다시 배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정처를 잃은 우리는 그냥 관성에 이끌리 듯 제주시를 향해 늘 그러했 듯이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바람때문에 잘 나가지 않았고 우리를 밀어낸 우도는 한동안 시야에서 없어지지 않고 오른쪽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전국일주여행자와 표류자 사이의 대화는 꽤 오래 끊어졌다.
제주 표류 팁
- 우도는 일주도로의 거리가 약 16킬로미터이다. 자전거로는 한시간 반, 걸어서는 네시간 정도 걸린다. 일정을 짜는데 참고하여야 한다.
배는 한시간에 한대씩 자주 있는 편이다. 일기예보를 참고해서 뱃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중간에 나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 표를 구매할 때 작성하게 되어 있는 양식에 연락처는 성실하게 기입하자. 급한 연락을 못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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