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섭지코지
만약 시간에 쫒겨 제주의 딱 한곳만 바삐 들러야 한다면 아마도 이곳을 추천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제주말로 좁은 곶이라는 뜻의
섭지코지이다. 워낙 아름다운 바다와 풍경인 탓에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장소로 여러번 쓰였다. 가까운 곳에 성산 일출봉이 있어 제주의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을 하나로 압축해놓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거기다 우도마저 지척에 있으니...
시인의 발길을 묶어두었던 그 그리운 바다 성산포다.
표류자는 지금까지 제주의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다보니 사실 바다에 조금 식상해 있었다. 그래서 듣기 좋은 노래도 한 두번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러나 나는 이곳 성산의 바다 앞에서 다시 바다에 취하고 말았다.
시인의 시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 생 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래도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뜬눈으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사람도 죽는 일을 못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해가 기울기 시작한 해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는 여행자의 뒷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갓길 없는 길로 관광객을
태운 커다란 버스가 지날 때면 우리는 때때로 위태했다. 그러나 좋은 풍경이 앞에 있으면 서서 구경하다가 다시 가고 싶으면 다시
가고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길 수도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여행수단은 없을 것 같았다.
섭지코지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자주 서서 카메라를 들었다. 섭지코지의 해변은 붉은 화산재로 이뤄져 있었다. 현지인들은 이를 [송이]라고
부른다. 해변을 주욱 돌아 이곳까지 오면서 붉은 해변은 처음이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주차장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걸어서 섭지코지 등대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별도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어서 꼭 무슨 복권에 당첨된 듯한 기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걷기를 싫어하지만 놓치기 싫었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에 계속 손이 가서
이렇게 계속 사진을 찍어대다간 까딱 잘못하면 메모리가 모자랄 수도 있겠다 싶었다.
16. 성당이냐 교회냐
잘 정비된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 가던 모녀의 대화가 재밌다.
- 저기가 그 드라마의 그 교회네.
- 교회가 아니고 성당!
- 응? 생긴 건 영판 교횐데.
- 아이, 엄만... 뒤쪽에 마리아상이 있잖아. 성당이야.
표류자의 시각에서도 이걸 개신교 교회라 불러야 할지 천주교 성당이라고 해야할지 좀 아리송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도 성당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다. 영국성공회 교회와 흡사하면서도 불완전한 로마네스크 형태의 건물에 십자가는 개신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형태를
썼고 생뚱맞게 뒷편에는 성모상이 있다. 그러나 통상의 성당은 성모상이 건물의 입구 측면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십자가도 형벌을 받고
있는 형태의 십자가나 조금 장식이 들어가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또한 일반적이다.
이런 형태를 어떤 의도가 있어 이렇게 제작했다면 드라마 미술팀의 실력이 대단한 것이고 몰라서 이렇게 했다면 좀 성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성당인지 개신교 교회건물인지 아직도 아리송한 건물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가장 높은 곳 등대에서 성산의 바다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였다.
등대위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고 사방팔방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전국일주여행자는 내가 올라가자마자 내려가기 바빴다.
내심 그와 동행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혼자 표류하였다면 절대 이곳까지 걸어서 올라오지 않았을 거다.
그냥 자전거 타고 어슬렁어슬렁 먼발치에서 훑어보고 스쳐지나갔을 공산이 크다.
그나마 동행이 있어서 억지로라도 따라온 것이었다. 이 풍경을 못보고 살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오싹해진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나는 성산의 바다를 거울 삼아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 둘 떠올려 보았다.
자전거 표류 팁
- 자전거는 주차장 자전거 거치대에 잠금장치를 이용해 묶어두면 된다. 의외로 사람들이 자전거에 관심이 없다. 너무 도난 때문에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은 시간을 내어서 둘러보도록 하자.
- 카메라의 메모리는 좀 넉넉하게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마구 찍어대다보니 메모리가 간당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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