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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 공원, 추억을 끌어내는 힘

자전거 탄 풍경

by 자전거여행자 2012. 2. 1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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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근대역사관에서


용두산공원을 향해 가다가 부산근대역사관에 들렀다. 자전거로 용두산 공원을 올라가려니 공원후문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덕분에 역사관

건물이 내 눈에 쉽게 들어왔다.


사진 찍는 습관이 잘못들어 건물전체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건물입구 안내판엔 1929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어졌으며 일본이 패망한 후 미군정의 임시숙소였다가 1949년 7월부터는 미국해외공보처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역사가 기술되어있다.


역사는 반복되기 십상이어서 일제에 의해 수탈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건물이 다시 미국문화를 전파하는 곳으로 변모를 하였으니

생각있는 사람의 시선에서는 크게 보기에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부산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안내판의 역사 기술에는 빠져있지만 이 건물이 가장 주목받은 일은 이른바 [부미방]사건이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 80년대의 미국이 대한민국과 그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지경이었는지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의 발언으로 압축

된다.


-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미방]사건은 반미운동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 마음엔 부산에서 더더군다나 여성까지 개입하여 거기다가 미국이라는 초거대 권력에 저항을 하였으니 역사적 평가는 달리할 

지 몰라도 당시엔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건물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새단장을 하여 시민들에게 공개되었고, 지금은 사건과 관련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건물의 새단장 만큼이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상당히 정교한 수준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거다.


[부미방]사건을 재판한 담당 판사는 이회창이었고 사건관련 일부 피의자들을 변호한 변호사는 노무현이었다


이 오래된 건물 앞에서 나는 괜히 몸이 떨렸다.









2.용두산 공원에서


역사관 내부 전시실을 어슬렁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용두산 공원으로 향하는데 행려병자 여인이 말을 걸어온다.


- 죄송한데, 천원만 주시면 안되겠어요?


- 없어요.


나는 냉정하게 답했다. 


열아홉 때였을까? 친구 요셉이와 용두산 공원에서 내기를 했었다. 


- 야, 내가 저번주에 어떤 할아버지께 주머니 탈탈 털어 돈을 빌려드렸거든... 오늘이 갚기로 한 날이야.


- 요셉아! 그 할아버지가 오늘 갚기로 한 약속을 지킬 것 같냐? 난 절대로 안올거라는 데에 한표.


- 넌 어째 사람을 그렇게 못믿어? 기다려봐 반드시 오실 거니까.


요셉은 자기 한달 용돈을 배고프다는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다 털어준 거였다. 우리는 세시간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기에 이겼지만 그날 라밥은 내가 샀다. 라밥은 라면밥을 줄일대로 줄인 말이다. 라밥을 먹는 요셉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 착한 친구 앞에서 내기에 이긴김에 입바른 소리로 그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타박할 수 없었다.


배고픈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며 굶기를 밥먹듯 하던 요셉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충청도의 모 성당 신부가 되었고, 나는 천원에 

냉정한 자전거 생활자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나에게 천원을 구걸한 행려병자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돌아와 천원만 주시면... 한다면 내 마음이 변할 것만 같았다.


이 한가한 공원에서 너무 냉정해져버린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괜히 쓸쓸해졌다.











3.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6.25 한국전쟁의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부산시 중구 일대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피난 보따리에 섞여 있던 책들이

한곳에 모인 곳이 이곳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로도 하루가 고단했던 시절이었는데도 이땅의 백성들은 천막을 치고 학교를 열었고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전통은 나의 유전자에도 어떻게 기록이 되었던 것인지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살아가는 일이 팍팍해질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차이가 있다면 나의 할아버지 세대는 책을 귀하게 여겨 바리바리 피난 보따리에 챙겼고 나는 많이 버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갈 때 부피와 무게가 많이 차지하는 책을 챙기지 않았다.


앞으론 다 버려도 책은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헌책방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헌책방 골목의 미덕은 책값이 싼 것도 있지만, 마치 음악을 듣다가 그 음악을 듣던 시절을 추억하듯

헌책을 보고 있다보면 그 예전이 쉽게 떠오르며 추억에 젖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성문종합영어를 보던 고등학교 시절이 휙, 지나갔다. 거로 Vocabulary Workshop을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보고 앉았던 시절도

휙, 지나갔다.


내가 청춘으로 살던 시대는 어쩌자고 영어단어 따위를 삼만삼천개나 외우게 강요하였던 것일까?


어쨌거나 나는 이 책 덕분에 입사시험 마지막 어휘력 문제의 정답을 맞출 수 있었다. 한글로 양수잡이를 영어로 쓰라는 문제였다. 

답은 ambidextrous이다. 뜻은 오른손잡이도 아니고 왼손잡이도 아니고 양손을 다 잘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나는 이 답을 쓰면서도 

참 하품이 나왔다.


살아가면서 이 단어를 영어로 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책에 깃든 개인의 소소한 역사를 뒤로 하고 나는 부평시장으로 향했다. 책방 중간 꽈배기와 찹쌀 도너츠집에서 연인들이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여자가 말했다.


- 아, 너무 맛있다.


공간이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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