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닭을 사러 갔다.양념과 이런저런 소스에 너무 버무려져서 도무지 닭고기 자체의 맛을 느낄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치킨이 아니라
그냥 통으로 기름솥에 풍덩 빠트렸다가 건져낸 시장표 통닭을 사러 갔다. 오년째 타고 다니는 비토가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통닭집 아주머니는 나와 자전거를 쉽게 알아본다. 얼굴을 가리던 버프를 내리고 주문을 했다.
- 사모님, 통닭 한 마리 주세요.
말을 건네고 나니 조금 우습다. 직장생활하던 때도 사장님, 사모님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어쩌다 자전거생활자가 되고 나서는
더 사장님, 사모님이 입에 붙어 버렸다. 지난 명절 때는 나를 사랑하는 매형에게조차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친지들이 모두
웃었다. 눈매가 가늘고 턱이 주걱모양을 한 주인 아주머니는 사모님 소리가 싫지 않은 눈치다.
- 통으로 그냥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잘라서 드릴까요?
잠시 망설이다가 잘라서 달라 했다. 처음 갔을 때는 워낙 시장 한 구석에 숨어 있어서 몰랐는데 알고보니 시장 일대에서 가장
장사 잘되기로 유명한 통닭집이었다. 주문하고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삼십분쯤 걸린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한시간 뒤에
오겠다고 하고는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늘 아름다웠다.
해가 지고 있는 공원에 젊은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몰려들었다. 픽시 동호회원들 같았다. 한곳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그들은 왕버드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았다. 이제 더는 자전거생활자가 아닌데도 자연스레 자전거에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입에 붙은 사장님, 사모님 소리처럼
이런 관심도 앞으로 꽤 오래 유지될 것 같았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은 젊은 친구들의 옷차림과 그들의 자전거가 몹시 사랑스러웠다. 남자 셋에 여자 둘. 테이크아웃 외식업체에서
사온 음식과 백퍼센트 과일주스를 꺼내어 놓고도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저 나이대에는 허름한 군복야상에 나이스 운동화를 꺾어 신고 주로 소주에 닭발을 안주로 포장마차나 주점을 전전했더랬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면 잘 모여지지가 않았는데 오늘 저들을 보니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변화가 많음을 느낀다.
했다는 이야기가 민주가 어쩌고 민족이 어쩌고 자본이 어쩌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는 잘 안떠오르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날새는 줄 몰랐다. 뭐 그래도 그 자리에 있던 멤버들은 다들 자기 살길은 잘 찾아갔는데 이 날 왕버드나무 아래에 모여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들은 무슨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와 그들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도통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리지 않았다.
통닭이나 먹으러 가자.
통닭집에 다시 들르니 아주머니가 검은색 비닐봉지를 두 보따리나 나에게 안긴다. 집에 와서 속을 살피니 통닭에 닭똥집 튀긴 것에 절인
무우와 양배추 샐러드 그리고 칠성사이다가 들어있다. 그러고도 만원 한 장이니 과연 저렴한 시장표 통닭이다.
통닭의 다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입 베어물었다. 다리살에 칼집을 내어 속까지 잘 익힌 고기에서 고소한 냄새가 확 풍긴다.
잘라 달라 한 것을 후회했다. 통닭은 역시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직접 뜯어 먹어야 제맛이다. 입으로 들어갈 음식의 질감을 손끝
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또다른 맛이 있다. 우리 음식이 뜨거운 국과 찌개가 있어 수저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인도처럼 밥을
손으로 꼭꼭 뭉쳐서 먹는 사람들은 혀끝으로 느끼는 음식의 맛에 덧붙여 손의 촉감으로도 음식을 느끼는 것이다
옆에 닭똥집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닭똥집에 밀가루 옷을 입혀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 내가
제일 먼저 먹은 음식일 것이다. 이십대 시절 국내에 유일하게 이런 방식으로 내놓는 원조격인 주점에 출입했었다. 버스터미널 종점에
다 쓰러져가던 주점이었는데 처음 먹었을 때 너무 신기한 맛이어서 친구들을 모조리 데리고 갔었다. 주점을 주로 찾던 손님들은
버스 기사나 막노동하는 분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학생놈(?)들이 판을 벌리고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 일곱명이서 창업했다 하여 이름이 칠성인 사이다를 땄다. 희안하게도 통닭집은 플라스틱이 아닌 유리병의
칠성사이다만 준다. 한모금 들이켜니 기름기 가득한 입안이 상쾌해진다.
버스터미널 종점의 주점은 어느날 재개발로 뭉개져버렸다. 칠성은 대기업에 인수합병되었다. 원조 주점은 소멸되어도 독특한 방식의
닭똥집은 이제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으며 주인은 바뀌었어도 칠성사이다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야상쪼가리 입고 다니며 시건방 떨던 나의 이십대는 사라졌고 이제 이도저도 아닌 늙수구레만 남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인정하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고 앞날이 크게 두렵지 않다.
계획했던 선명한 길을 따라 묵묵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통닭의 맛이 유난한 날이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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