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마음엔 평화가
제주에서는 길을 잘못들어도 사방팔방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곧 되돌릴 수 있어서 낭패를 경험할 가능성은 적다. 이정표를 잘
보면서 달려가던 표류자도 사거리 삼거리가 동시에 겹치는 상황에서 살짝 길을 잘못들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이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마음엔 평화가 한가득이었다.
도보 여행자나 스쿠터 여행자 혹은 자동차로 드라이브 하는 사람도 표류자가 느끼는 비슷한 감정이 생기는지 좀 궁금하다.
길을 달리다가 좋아서 가슴이 쿵쾅거려본 적이 있는가? 자전거로만 여행을 다닌 표류자는 그런 경험이 많다. 그 가슴 설레임이
잘못 찾아 들어간 제주의 길에서 똑같이 일어났다.
아...
나는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이 길을 혼자 독점하여 달리면서 낮게 신음했다. 갓길 한뼘 없는 제주의 마을길은 해가 떨어져
집찾아 날아다니는 새소리만 간혹 들렸다. 나는 일부러 자전거에서 내려 낯선 길 낯선 풀밭을 서성였다. 당대의 훌륭한 연출가
무한도전 김태호 피디의 [명수는 12살]편이 떠올랐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놀이나 정서를 학원 아니면 PC방을 전전하는 요즘 어린아이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여행을 떠나서 낯선 곳 낯선 길 위에 홀로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에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만 공터에 남은 12살 소년 박명수의 깊은 슬픔이 떠오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길을 혼자 걷고 있다는 감정이 들 때면 더더욱.
표류의 길은 마치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인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따져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혼자 갈 것이냐!
달리던 길을 멈추니까 엉뚱한 잡생각이 이렇게 파고드는 것이다. 냉큼 자전거 안장에 다시 올라 잘못들어선 길을 바로잡기 위해
비엘바이크파크 이정표를 따라 세화리를 벗어나고자 애썼다.
첫날 제주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음식점 주인 아주머니는 고향이 경북인데 제주에 입도한 지는 한
칠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주에 살아보니 매년 좋은 곳이 생긴다는 거였다. 일년 열심히 관광을 다닌 후로
더 돌아볼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곳이 참 보기 좋은 곳이 많더라, 하였다.
한 번 갔을 때는 별 거 없네, 하고 무심코 지나친 곳이 다음 계절에 들러보니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언제 생겼는 지도 몰랐는데
새로운 관광지가 느닷없이 생긴 곳도 많고.
맞는 말이었다. 나도 일주도로를 돌며 여러군데를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렇게 길을 잘못들어 살짝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넓은 자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볼거리가 의도와 상관없이 불쑥 나타났으니 짧은 기간에 제주를 다 느껴보겠다는 것은
그저 사람의 욕심일 것이다.
어릴 때의 소원이 이런 로봇의 은밀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거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 다다랗다.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중 이른바 원조라고 일컬어 지는 곳이다. 표류를 시작하면서 역시 희망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곳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숙소가 보이는 순간 중산간을 횡단하느라 힘들고 허기져서인지 머리 속은 빨리 씻고 난 후 거창한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넘어온 한라산 쪽으로 하루의 해가 곱게 지고 있었다.
자전거 표류 팁
- 지도는 행정구역과 관광지가 동시에 꼼꼼히 표기되어 있는 것을 선택하자. 공항이나 항구는 물론이고 숙소 근처에는 여러종류의 제주지도를
무료로 구할 수 있다. 가끔 관광지 위주로만 되어 있는 지도는 길찾을 때 불리하다.
- 자전거 타기는 되도록 다섯시 이전에 끝내는 것이 좋다. 충분히 쉬기도 해야하고 야간 라이딩은 아무래도 사고의 위험이 있다. 성수기가 아닌
탓도 있지만 제주의 밤은 몹시 적막하다. 해서 자동차 운전자도 좀 거칠게 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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