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1.빛의 중심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모제까지는 현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찾아가지 않았다. 3주기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가
자전거에 올랐다. 그러고보니 삼년 탈상을 하는 의미도 있고, 요즘 부쩍 내가 좋아하는 모든 유무형의 대상에 대해 내 태도를 좀 선명하게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해서 망설이지 않고 되도록이면 대상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길을 나섰다.
냄새 나는 온천천의 자전거길 한켠에 조성해 놓은 물고기 부조가 눈에 띄었다. 많은 물고기들이 세찬 물줄기를 거꾸러 거슬러 한곳으로
흘러가듯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기념식장이 열리는 대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마도 저 멀리 소실점을 형성하고 있는 빛의 중심일 것이다.
2.허기
학교 주변은 번화했다. 많은 사람이 한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연인과의 데이트에
프로야구에 혹은 스마트폰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일이 섭섭하지 않다.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이 판국에 배가
고픈 것처럼.
추모제가 열리는 시간은 마침 저녁시간이라 나는 미리 요기할 곳을 찾았다. 학교 앞은 이 고물가시대에도 기적같은 가격의 국수와 떡볶이를
팔았다. 옛 생각도 나고 해서 자리를 잡았다. 대학가에 가면 가끔 보이는 무릎 나온 운동복에 덮수룩한 머리를 한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고 그가 주문한 음식이 뒤에 나왔다. 나에게는 아무 말 안하던 주인 아주머니가 무릎나온운동복 남자에게 말했다.
- 음식값은 선불입니다.
- 여깄소.
남자는 영 마뜩찮다는 인상을 하고 주머니에서 접히고 접힌 지폐 몇장을 주인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가지고
일어섰다. 돈을 꺼네어 건넸다.
- 선불인지 몰랐습니다. 제 음식값도 받으세요.
주인 아주머니는 몹시 당황해 하며 음식값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주머니는 오늘 이 남자는 아니지만 무릎 나온 운동복에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사내가 음식값을 안내고 배를 들이미는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저렴하고도 저렴한 음식값도
받지 못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리 한 것이었다.
내가 한 행동은 무슨 대단한 작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순간 그냥 그 남자와 똑같은 대접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3.좋아하는 것과의 거리
운동복 남자에게서 학교주변은 가장 서식하기 좋은 곳이었으리라. 자주 뭔가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가끔 푼돈이라도
건질 수 있어서 좋고 거기다 허기를 재울 음식값도 저렴하니 이 곳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형태는 아니지만
나또한 학교주변에서의 삶을 꿈꾼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대상이라도 때가 되면 다른 상황과 자리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사람의 사는 일일 것이다.
괜히 볼일도 없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좋아하는 대상의 주변에서 오래 서성이고 있어봐야 운동복 남자처럼 미리 음식값을 내야하는
찬밥 신세로 전락하기가 쉽다.
아마도 대통령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져 갔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통령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야박한 대접을 받을 지도 모른다. 노빠에 광신도에 종북좌파에 어쩌고 저쩌고...
그런 대접에 크게 게의치 않는다. 나는 예의를 모르는 자들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그래도 드는 생각은 지금으로부터 한 십년 뒤에는 대통령과 나의 거리가 지금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좀 씁쓸하지만...
뭐, 그 또한 사람의 사는 일이다.
음식을 다 먹고 일어섰다. 역시 학교 근처 음식은 색깔에만 충실한 음식이기 쉽다. 가격이 가격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음식은 보는 맛도 있는 것이니 잘 먹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잘먹고 갑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으나 주인은 답하지 않았다.
4.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풍선을 나눠주며 손님들을 맞았다. 멋모르는 애도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풍선 떠트리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바닥에 붙여놓은 행사장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나는 발길을
피해 밟지 않았다. 역시 사람 마음이 다 같지는 않은 것이다.
추모제의 정식 명칭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3주기 추모문화제]였다. 추모제에서 문화제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제 울고만 있지 말고
표정을 좀 밝게 해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하기는 대통령께서도 언제까지 눈물바람이나 하고 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울적해졌지만 다행히 울지 않았다.
운동장엔 조금씩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엔 내코를 의심했다. 행사가 벌어지는 운동장 주변에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는 거였다. 단백질이 부폐할 때 생기는 독한 냄새였다. 유심히 살피니 운동장 주변으로 물이 빠지게 되어 있는 하수로가 포장박스로
가려져 있었다. 냄새의 원인은 그곳이었다. 물은 빠지지 않아 고여 있었고 물빛은 고약했다.
괜히 더럭 의심이 들었다. 지인이 이 학교 출신이어서 뒷날 물어보았다.
- 학교 운동장 하수로로 참기 힘든 악취가 올라오던데 학교 다닐 때도 그런 냄새가 난 적이 있어요?
- 예? 거기서 냄새가 날 일이 없을 텐데. 그런 적이 없고 만약 그런 냄새가 났다면 학교에서 당장 조치가 있었겠죠.
세월이 하도 수상하니 별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이다. 이런 스스로가 너무 예민한 것 같아 쓴웃음이 난다. 그냥 혼자만의 하찮은 의심이었길
오히려 바란다.
5.추모제와 사람들
추모제 시작시간과 가까워졌음에도 자리가 다 차지 않아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기우였다. 순식간에 운동장은 가득 찼고 스탠드
위로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제 갓 서원을 마친 새끼수녀 그룹도 눈에 특별하게 보였고,
처음에는 좀 좋게 보지 않았지만, 한바탕 음식을 먹으며 술판을 벌이는 가족들도 밉지 않아 보였고,
가족 전체가 도시락을 싸와서 진지하게 추모식을 기다리는 가족도 있었고,
다정한 연인들은 수녀에게 얻은 가면을 들고 살펴보며 즐거워 하였다.
운동장쪽에서 사람들이 웅성이더니 이윽고 환영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문재인 이사장이 행사장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사장에게 당선의
영광을 준 부산시민들이 고맙고도 자랑스러웠다.
아마도 부산의 변화는 우리 역사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할 것이다.
6.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본격적으로 추모제가 시작되고 대형 전광판에는 생전 대통령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앞에 오오사이즈를 유지하고 있는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 아이를 안고 그 모습을 보다 끝내 눈물짓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카메라에 시선을 집중했다. 울지 않으려고
그랬다. 노찾사는 애국가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처음엔 노찾사의 목소리만 들렸다.
사아랑도 명예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 두 사람 노찾사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어느새 나도 따라 불렀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아... 내가 이 노래를 다시 부를 날이 다시 올 줄이야. 이 노래를 한참 불렀던 시절과 지금의 세월, 두 세월 중에 언제가 더 나았다는
평가는 엄중한 역사의 잣대가 할 것이다. 다만, 나는 학교를 떠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시 이 노래를 부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내 개인의 역사에서 보면 명백히 노래를 부르던 시절로 역사는 퇴행해버린 꼴이다.
대통령의 생전 육성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눈물바람으로 상록수를 합창했다. 눈물은 거기까지였다. 주체측은 이제 더는 울지말자고 선언했다. 그리고 낙선한
출마자들을 하나 둘 불러올려 낄낄거리게 만드는 토크로 멘탈붕괴 상태를 극복하려 애썼다.
밤은 깊어가는데 사람들은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십년 후의 일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십년 뒤의 세월을 대통령과 함께
늙어가지 못한다니 그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