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탄 풍경

[제주표류19]원했으나 이뤄지지 못한 것, 인연이라는 질긴 끈

자전거여행자 2012. 3. 29. 01:05



33. 원했으나 이뤄지지 못한 것


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정처를 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방에서 초코파이를 꺼내어 먹으면서 곰곰 생각에 잠겼다. 표류를 출발하면서

꿈꿨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 그럴듯한 것만 먹고 다니자.

.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고 며칠이고 지내자.

. 포스팅만으로 익숙한 제주의 블로거를 우연히라도 만나자.


그러고보니 세가지 다 썩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나는 일단 다시 바다쪽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돌렸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주소 하나

만 떠올리며 제주의 간선도로를 따라 질풍(?)같이 달렸다. 그래, 바다가 가까운 그 가게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자. 그리고 지치고 힘든 

몸을 잠시 쉬게하자. 그런 후엔 바베큐파티가 유명하다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며칠이고 늦잠이나 자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처음으로 스마트폰이 아쉬웠다. 


기억나는 주소로는 가게를 찾을 수 없었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도 가게 이름을 알지 못했다. 동네 전체를 세번 정도 뱅글뱅글 돌다가

나는 그만 내가 가진 에너지의 전부를 소진하고 말았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간에. 물한잔과 행동식으로 허기를

재우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달리고 달리다보니 어느덧 다시 그 자리 그 

바닷가에 당도해 있었다. 쓴웃음이 났다. 표류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멜일행은 일과 구걸로 모은 돈으로 배를 사서 조선을 탈출하게 된다. 순천에 있던 동료와 연락이 닿아 모두 여덟명이 어두운 날을 틈타

1663년 9월 4일 여수를 떠나 항해 삼일만에 일본 연안에 도착하였다. 13년 28일간의 표류를 끝내고 나가사키의 동인도회사 상관이 있던 

데지마에서 그들은 현지 직원으로부터 다시 네들란드 옷을 받았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서방에 조선을 소개하는 최초의 책자 하멜

표류기를 쓰게 되었다.


13년.


긴 세월이다. 그런데 나는 벌써 지치다니.


나는 시작점이었던 제주시에 가서 다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가장 힘든 날이었다. 육체든 정신이든.


휴대폰이 울렸다. 안동간고등어였다. 


- 표류자 형님, 여기 마라도인데요. 짬뽕집이 너무 많아요. 어디가 원조인지 모르겠어요. 아시면 좀 가르쳐주세요.


- 몰라요, 배고파 죽겠는데 약올려요? 그런데 오늘은 어디에서 숙소를 잡을 건가요? 가까운데 잘거면 같이 잡시다.


간고등어는 산방산 근처에서 잔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자전거로 너무 먼 거리였다. 지친 나에게는 더더군다나. 그는 내일이면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난다고 하였다. 제주를 벗어나 건강한 일상으로의 복귀가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하멜이 그랬던

것처럼.










34. 인연이라는 질긴 끈


제주시에 접어들어 제주국립박물관을 지날 때였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침에 단체사진을 찍어

주었던 여성여행자 두사람이었다. 여성들이 잘 타지도 않던 자전거로 제주일주를 해낸 거였다. 역시 이런 거를 봐도 여성이

연약하다는 것은 미신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자전거를 세우고 인사를 했다. 여행지에서는 아주 사소한 인연이라도 마음이

금방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돌았던 일정을 짧게 이야기하고 서둘러 가던 길을 갔다. 두사람은 임대했던 자전거를 반납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서울행 비행기를 탄다고 하였다. 


이건 일종의 나이값인데 나같은 늙수구레는 빨리 사라져 주는 게 예의다.


동문시장에 들러 한참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날 처음 먹은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메뉴는 고기국수였다. 털썩.

나는 고기국수를 먹으며 참 희안한 맛이라고 느꼈다. 이번이 두번째 먹어보는 건데 맛이 처음 것과 너무 차이가 났다.

육수의 재료가 전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물맛이 달랐다. 게다가 동문시장에서 먹은 국수는 새우젓이

나왔다. 서귀포에서와는 다른 고명이 뿌려져 있었다. 들깨가루 같았다. 육지는 보통 잔치국수하면 소면을 써서 면이

가늘고 쫄깃한 식감이 있는데 제주의 고기국수는 중면을 썼는데도 쫄깃한 감은 떨어지고 약간 퍼진 듯하면서 밀가루

냄새가 많이 났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제주에서 고기국수는 최근에 생긴 음식이라는 거였다. 아마도 어떤 정형화가 덜 되어 아직 이런저런

진화가 진행중인 음식이어서 여기 맛이 다르고 저기 맛이 다른 듯하였다.


배를 채우고 가게를 나서는데 동문시장은 그 규모나 상품의 차림이 몹시 크고 볼만하였다. 특징이 있다면 재래시장에

교복 입은 여고생들의 모습이 흔했다는 것과 일본인들이 상인들과 흥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시장의 터줏대감들이 서로 사용하는 제주말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싸우는 것인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도도 파악을 할 수 없었다.


시장은 물론이고 이 제주말이 소멸되지 말았으면 했다.


시장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맞은편에서 아까 그 여성 두분이 회를 사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압!


순간 할말도 별로 없고 해서 어? 또 만났네요. 전 고기국수 먹었어요. 회 맛있게 드세요. 하고는 도망치 듯 시장을 빠져

나왔다. 통상 이런 사람의 성향을 일컬어 숫기가 없다고 한다. 늙수구레에다 숫기마저 없으니 어디가서 밥 얻어 먹기는

애저녁에 글러버린 것이다.


제주시는 여느 도시와 차이가 없었다. 도회지를 압축해 놓은 듯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시내버스 기사는 택시기사에게 경적을 

세게 울리며 쌍욕을 해댔다. 운전 똑바로 하라고. 술 먹었냐고.




정처를 잃은 나는 일단 제주항쪽으로 자전거를 저어 나아갔다. 


압!


정면 횡단보도 쪽에서 또 그 여성분들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할말도 없고 괜히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고. 나는 두 사람을 우회하기

위해 미리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길로 방향을 잡았다. 


압!


그런데 두 사람도 마침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 편 작은 공원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기디 질긴 인연이랄까.

나는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며 피해도 자꾸 만나게 되니 같이 술 한잔 하자 하였다. 친구사이인 두 여성이 부러웠다. 나는 자전거여행의

고단함을 잘 아는 사람이라 지금까지 두 사람이 일주도로를 돌면서 마냥 하하호호 하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앞에 가는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멀찍이 뒤떨어져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가 짜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예전엔 스쿠터로 다닌 여행을 이번엔 자전거로 달려보자, 의기투합하여 천신만고 끝에 완주를 해냈다고 약간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자전거여행은 잘못하면 친구 사이가 좀 멀어지기 십상이다. 해서 나는 두 사람의 우정을 오래오래 유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술을 한잔 들이켜고 나는 그간 표류중에 만났던 인연들과 표류중 겪었던 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예의로 그랬는지 정말 재미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제법 웃어주었다.


청춘의 열정 하나로 자전거 여행을 감행하고 저렴한 시장에서 횟거리를 사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공원에 앉아 술한잔 할 수 있는

둘의 건강한 용기와 우정이 부러웠다. 더 나누고 싶은 사연은 많았으나 역시 우리는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35. 다시 항구


해가 떨어지고 있는 항구는 평화로웠다. 문득 나의 표류는 항구에서 다시 또 다른 항구로 이어져 오래 계속될 것 같았다.

우도에서 만났던 찻집 어르신의 말씀이 먼 바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가 구만리라는 이야기가 있어. 너무 머리로만 생각하지마. 그러다간 생각만 많아지고 평생 아무것도 못해.

가슴이 시키는대로 해야 해. 자네들의 그 식지 않은 가슴이 시키는 바로 그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아.]


그래! 다시 표류다. 


나는 먹다 남은 소주병을 다시 땄다. 김윤아의 노래가 떠올랐다.



고잉 홈(Going home)                              - 김윤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해 본다.



자전거 표류 팁


- 재래시장은 꼭 들러보자.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이십퍼센트 정도 저렴하다.


- 자전거 여행중에 생겼던 동행자와의 안좋은 감정은 자전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술한잔으로 훌훌 털어버리자. 우정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