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표류6]바람이 분다. 너영나영
11. 바람이 분다. 너영나영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내 마음 속에도 바람이 분다.
제주는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삼다도라 불리기도 했다. 땅 자체에 돌이 많아 제주사람은 돌과 흙을 구분하면서 삶을 시작했다.
골라낸 돌로 바람을 막는 경계를 쌓았고 살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심었다. 그러나 땅은 작물을 잘 길러내지 못해서 제주사람은 늘
가난했다.
육지의 여자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닐 때, 제주의 여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워낙 돌이 많아 넘어지기라도 하면 항아리를
깨어먹기 일쑤였고,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몸을 잘 가눌 수 없어서 또한 애써 길은 물을 엎질러버리기가 다반사였다. 해서 제주
비바리들은 물허벅을 물구덕에 담아 멜빵을 어깨로 해서 등에 밀착해 물을 길어 날랐다.
지금은 이 모든 일이 기록에만 남아 있는 일이다. 보기 좋은 한라산이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어서 현무암 토질은 물을
머금지 못했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바닷가 용천수가 흐르는 곳까지 가야했으니 여인들의 바지런함이 없으면 삶이 연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여자들의 모습이 외부사람 눈에는 흔하게 띄었다. 해서 삼다의 한가지로 여자가 들어간 것이다.
한가지 더 덧붙이면 뱃일 나간 남자들이 풍랑이라도 잘못 만나 바다에서 숨지게 되면 한 마을 전체의 제삿날이 같은 날이 되는 일도
있었으니.
제주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바람이 돌로 만든 경계를 허물었고 돌보지 않아도 무성하게 자라는 풀이 돋았다.
현대화된 제주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되었지만 가슴 속 한이야 온전히 씻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9년 통계지만 이제 제주는 여성의 숫자보다 남성의 숫자가 많다. 삼다의 내용에 수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
돌과 바람은 여전히 많다. 이제 여자는 빠지고 표류하는 사람들이 추가되면 그럴듯하겠다.
-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상사랑이로구나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구요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배가 고팠다.
너영나영[제주도민요] / 김용우 가사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호박은 늙으면 맛이나 좋구요
사랑이 늙으면 무엇에나 쓰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저 달은 둥근 달 산넘어 가는데
이 몸은 언제면 님 만나 함께 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백록담 올라갈 땐 누이동생 하더니
한라산 올라가니 신랑각시가 된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높은 산 산상봉 외로운 소나무
누구를 믿고서 왜 홀로 앉았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구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출처] 너영나영 [제주도 민요][신민요]|작성자 콩나물
12. 밥해먹기
표류자와 전국일주여행자는 표선해비치해변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먼저 세우고 전국일주여행자가 두리번거렸다. 뭐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밥을 할만한 자리를 찾고 있다는 거였다. 설마 했는데 자기는 꼭 이 근처에서 밥을 직접 해서 김치에 비벼 먹고 싶다는
거였다.
- 전국일주여행자님, 쌀이랑 김치를 가져왔단 말입니까?
- 그럼요. 고추장이랑 참기름도 있어요.
바람이 사방팔방 불어대니 버너를 설치할 장소가 마땅찮았다. 화장실 건물 옆이 좋겠다는 전국일주여행자를 설득해 최대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바닷가 근처 방파제 아래로 그를 끌고갔다. 아무리 표류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완전히 노출된 공간에서 어찌보면
다른 사람들 눈에 초라하게 보이는 일을 벌이지 못하는 성격이다.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했다.
- 바람이 많이 불어 밥하기가 곤란하니 웬만하면 근처 식당에서 사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시간도 절약하고...
- 어? 표류자님, 저 밥 잘해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온 김치가 정말 맛있어요. 믿어주세요.
미심쩍었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자전거는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짐이 많았다.
전국일주여행자의 가방 속에서 버너가 나오고 코펠이 나왔다. 그리고 약 한달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김치통이 나왔고 쌀보따리가
나왔다. 궁금해서 속을 보니 라면도 있었다.
전국일주여행자는 능숙한 솜씨로 불을 만들고 쌀을 끓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뭔가 믿음이 가면서 일단 맛을 떠나서 이것도 추억의 하나일
수 있겠다 싶어 웃음이 났다.
아,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는 밥이 끓기 시작하자 수시로 코펠의 두껑을 열어 내용물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 아니, 전국일주여행자님! 밥을 하신다면서 왜 그렇게 자주 두껑을 여는 겁니까?
- 이렇게 확인하다가 밑에 밥을 뒤집어줘야 해요. 그래야 밑바닥이 눌러붙지 않아요.
나는 그의 밥을 잘한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 전국일주여행자님! 묻겠는데, 뜸을 들인다는 개념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 ... ...
아, 그랬다. 그는 평생 전기밥솥의 은혜만 받은 세대였다. 냄비나 연탄 혹은 솥과 같은 것으로 밥을 짓는 것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밥짓기를 즉시 중단시켰고 불을 줄이고 코펠의 두껑을 못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수긍을 못하는 눈치였다.
- 제가 하는 방식으로 해도 밥맛이 아주 좋은데... 친구들이 오면 내가 주로 요리를 하는데... 그들은 아주 맛있다고 했는데...
- 아니, 전국일주여행자님... 밥할 때 뜸을 들여야 쌀냄새도 덜나고 찰기가 생기죠.
- 음... 처음엔 좀 그렇지만 식으면서 수분을 흡수해서 맛이 있는데...
전국일주여행자의 나이는 참고로 이십 구세다. 이십 구세 정도의 세대가 이 나라의 주류가 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평하는 맛집의 정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몇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세치 혀 끝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둔감한 편이다. 왜냐면 내 기억속의 고향의 맛이란 합성감미료와 설탕
맛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 죽겠는 어머니는 김장철이나 음식하실 때 허연 MSG를 신나게(?) 쓰셨다. 그리고 된장국에도
설탕, 나물에도 설탕, 찌게에도 설탕... 아낌없이 설탕을 쓰셨다.
이땅에 설탕이 들어온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머니 세대는 설탕이 빠진 음식을 드시다가 설탕맛에 한 번 길들여지니
설탕 빠진 음식은 맛이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촌형님 집에 가면 설탕이 아니라 그것도 아낀다며 사카린을 듬뿍듬뿍.
사촌형님댁의 백모님은 더 고단한 삶을 사시던 분이라 내고향 여덟시(?)에 나오는 고향의 맛을 재현해 내며 폼을 잡을 여유가 없었다.
방학때 가서 보면 논일과 밭일에 허리가 끊어지게 생겼는데 고향의 맛을 재현하느라 일곱시간 여덟시간 요리를 하고 앉았을 시간이 없었다.
몇십년 전통, 독특한 비법, 원조 어쩌고 저쩌고...
다 필요없다. 음식은 정확한 식재료로 깨끗하게만 조리하면 그만이다. 맛있게 하려고 하다보니 이것저것 다른 궁리가 생기는 법이다.
뽀얀 국물을 내기 위해 커피 크림을 통째로 넣고 시원한 깍두기 맛을 내기 위해 사이다를 들이 붓고 매운 맛을 내기 위해 화학품
켑사이신을 뒤섞는 일은 이제 우리 주변 음식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다.
괜히 흥분한 이유는 결국 밥도 내가 마무리를 하였고, 라면도 내가 끓였다는 기억이 되살아나서이다. 전국일주여행자는 자기 취사도구로
퍼진 라면만 먹었다고 실토를 했다. 해서 내가 요령을 부려 비교적 불지 않은 라면을 끓여냈다. 가장 하일라이트는 그렇게 맛있다고 자랑하던
그의 김치가 한 열흘 여행기간 중에 냉장고가 아닌 가방속에 있다보니 푹 쉬어 있었다는 거다.
우리는 그렇게 쉬어빠진 김치를 반찬 삼아 탄수화물 충만한 점심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전국일주여행자의 자신감만은 높이 살만했다. 내가 저 나이쯤에는 이러자고 말도 못꺼냈을 것이다.
13. 여유
밥먹은 뒷정리를 깨끗이 했다. 나와 전국일주여행자 사이에 가장 정서적으로 부합하는 부분은 환경보존에 대한 인식이다. 가끔 나를 당황스럽게
하다가도 사소한 쓰레기조차 버리면 안된다며 별도의 쓰레기 수거용 봉투를 꺼내는 전국일주여행자를 대하면 괜히 기특한 생각이 들어
잠시 잠깐 다른 속내를 품었던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해안가엔 솔직히 여행객이 투기한 것으로밖에 판단이 안되는 쓰레기가 많았다. 그리고 몇번 확인한 일이지만 일부 제주도민들은 쓰레기의
불법적인 소각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대놓고 고무와 플라스틱을 태우니 그 냄새가 몹시 역하였다.
육지것들은 되도록이면 손님으로서의 예를 갖췄으면 하고 도민들은 주인된 자의 품위를 지켰으면 한다.
- 표류자님, 차 드세요.
- 응? 가방속에 커피도 가지고 오셨어요?
- 네, 손톱깎기도 있어요.
많이 웃었다. 도보여행자를 위한 안내조형물 앞에 기대어 놓은 나의 자전거도 웃는 듯했다. 우리는 차를 나누어 마시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돌로 쌓은 환해장성을 따라 한동안 저어가니 멀리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있었다.
자전거 표류 팁
- 너영나영은 세마치 장단으로 쉬운 곡조의 제주민요다. 길을 떠나기 전에 익혀두었다가 입으로 흥얼거리며 자전거를 타보자! 길이 더 정겹다.
친절하게 세마치 장단의 구음까지 알려주면... [덩 덩 덕 쿵 덕]이다.
- 취사는 바람이 사방팔방 세게 불기 때문에 라면 정도가 적당하다.
- 쓰레기는 각 마을 마다 분리수거함이 있다. 쉽게 찾을 수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지정된 장소에 버리자. 이건 팁이 아니고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