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표류4]표류하는 자와 여행하는 자들
7. 표류하는 자와 여행하는 자들
아름다운 섬 차귀도와 와도다. 이 섬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제주의 서쪽에 당도한 것이 된다. 이날 바람은 불었으나 날씨가 맑은 날이라
차귀도와 와도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육지의 일들이 슬며시 떠오르는 것을 재빨리 억눌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의외로 자전거 여행자를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3월의 제주는 관광비수기에
속한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관광객의 수가 성수기에 비해 많이 차이가 난다. 이유는 아직 제주의 3월은 춥고 바람찬데다
3월이면 다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계획을 실천하는 달이기 십상이다. 관광보다는 아무래도 생활의 일을 벌이기에 바쁜 달이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표류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망각하고 흘러온 길 언덕에서 자전거 여행자 한명이 나타나자 몹시 반가웠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하멜은 표류한 지 약 두달 지나 고향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미 조선에 정착한지 오래되어 네들란드어를 많이 잊어버린 그는 벨테브레이
조선명 박연이었다. 고향을 떠나 표류하던 자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떤 심정일까. 그 정도의 반가움은 아니었어도
군대가기 전에 자전거여행을 하기 위해 제주에 왔다는 인천입대예정자가 나는 제법 반가웠다.
우리는 잠시 동행을 하게 된다.
입대예정자는 자전거 여행 이틀째였다. 그는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못했다. 평소 자전거를 안타다가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되면
둘째날이 가장 엉덩이가 아프다. 마치 곤장을 맞은 것처럼 엉덩이에 불이 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표류의
외로움을 잠시 달래기에는 좋았으나 아, 이 입대예정자는 너무 자전거여행의 준비가 부실했다. 변속의 개념이 없어 오르막이 나타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걷는 것이었다. 그리고 엉덩이가 아파 짐받이에 매달아 놓은 가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약간 어기적거리는 우스운 꼴로
페달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짐받이가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큐알이 휠 정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교정해주다가 문득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전거 생활자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자전거로 제주에서 표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인가?
- 입대예정자님, 계속 이렇게 타다가는 자전거 여행이 아니라 몸고생 마음고생하실겁니다. 먼저 갈 테니 만약 자전거에 문제가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하세요. 그럼 출장서비스가 가능한 분이 달려와 주실 겁니다.
입대예정자도 나에게 미안해 하면서 붙잡지 않았다.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는 해와 제주의 서쪽바다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그러나 사실 다른쪽 바다와 물빛깔이 달라서
조금 을씨년스러운 맛도 있다. 도보여행자들이 심심찮게 지나갔다. 사람 못살 동네라서 모슬포라는 소리가 있는데 모슬포 근처 사람이
돌보지 않는 유채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또 다른 자전거 여행자의 모습이 다가왔다.
나는 여행자의 자전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일주를 목표로 전라도에서 제주로 넘어왔다는 거였다. 한달 무급휴가를 내고 길을 떠났다는데 자전거 전체의 무게가 엄청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전거 생활자의 자세로 넘어왔다. 스캇 지니어스면 엄청난 고가의 자전거인데 풀서스펜션 자전거에 짐받이를
달았다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자전거에는 앞브레이크가 없었다. 사연인즉슨 앞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겼는데 일정에 쫒겨 그냥
왔다고 했다. 쓸일이 없어서 필요도 없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전거 균형과 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파트가 앞브레이크인데 그게 필요 없다니...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은 일은 뒷날 잘한 일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열정과 무모함의 차이는 뭘까?
8. 동행
낯선 곳에서 동행이 생기면 어느 누구라도 약간의 안도감이 생기게 된다. 설사 그 동행이 마지막까지 해피엔딩이 되지 못할지라도.
전국일주여행자는 모슬포항에서 배타고 마라도에 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서귀포까지 간다고 하였다. 나의 목적지는 하멜이 처음
표착한 곳 산방산 근처이다. 일단 동행하기로 하였다.
해안도로나 일주도로엔 크게 산이라고 할만한 산이 없다. 해서 멀리 산방산이 눈에 들어오자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사실 동행이 생기면서 사진의 컷수가 줄어들었다. 전국일주여행자는 카메라를 잡고 슈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1.5초를 넘지 않았다.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바들바들 떨며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르는 나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멀찍이 앞서가는 전국일주여행자를 불러세웠다. 하멜의 표착지 용머리 해안이 눈앞에 있어서였다. 지금은 하멜의 상선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후회가 되는데, 역시 우리의 동행은 여기서 끝냈어야 했다. 나는 표류지에서 느닷없이 혼자 밤을 보내야 한다는 공포감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멜이 타고 온 배 스페르베르호의 선원은 64명이었다. 그 중 36명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부러진 돛을 이용해
텐트를 쳤다.
길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전국일주여행자를 따라 서귀포까지 가기로 결정하고 만다. 표류이니 애초에
계획이란 무의미한 것이라 자위하며.
자전거 표류 팁
- 자전거 여행을 하기 전에는 최소한 일주일 정도라도 한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서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좋다. 간단한 정비나 변속요령은 반드시 습득
해야 몸고생이 덜하다.
- 자전거 상태는 반드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제동과 변속은 하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안전과 직결된 문제다.
- 제주에서 숙박지를 정할 때는 한여름 성수기가 아닌 이상 조금 일찍 다섯시 이전에만 가면 언제나 잘 곳은 있다. 시내 모텔도 의외로 저렴하니 두사람
이상이면 오히려 모텔이 저렴하다. 일박에 삼만원 정도이니 두사람이면 만오천원 꼴이다. 시설 나쁘고 제약이 많은 게스트하우스보다 나은 점도 있다.
- 동행은 웬만하면 여행의 목적과 스타일이 맞는 사람과 하는 편이 좋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의 생각과 일정을 위해 과감하게 헤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