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흐린 주점

자전거여행자 2011. 11. 2. 03:11

 

 

1.흐린 주점

 

흐린 주점에 앉아 술을 마셨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탓에 주점은 더 흐려보였다. 주점 따위가 흐리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인 거냐고 따지지 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이 흐리면 사물이 온통 그렇게 보이는 거다.

 

자, 흐린 주점의 술은 아래와 같이 흐리멍텅하게 기립해 있었다. 내 이 술을 다 마시고 취하여 몸져 누우리...

작심은 그러했으나 기껏 예닐곱병만 마셨다.

 

지역방송국에서는 불꽃축제 중계화면이 흐르기 시작했다.

 

뻥뻥...

 

 

 

2. 사소한 것의 특별함

 

온 사방에 술가게는 넘쳐난다. 세치 혀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하여 나는 둔감하다. 안주거리 삼겹살이야 그 맛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 것이며 한 번 좋은 맛에 감격한들 그 순간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평소 소신에 따라 기름진 음식에는 눈길을 오래 두지 않고 겉절이에 먼저 젓가락질을 했다.

 

아사삭.

 

몸피 두터운 주인 아줌마가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여린 배추이파리를 저작하는 순간 나는 육고기를 먹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 그렇지. 이 가게는 밥과 김치가 맛있는 가게였지. 나는 눈에 띄게 겉절이만 처먹었다.

기본적이고 가장 사소한 맛이 나는 그리웠던 거였다.

 

어떻게 보면 되게 쉬워보이고 사소한 것을 충족하지 못해 마음이 때때로 흐려지는 것이 인생이다.

 

사소한 충족의 예를 들자면, 오늘같이 불꽃축제로 도회 한켠이 뻥뻥거리고 있는 날이면 좋은 사람과 함께 암흑의 천공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을 맞이하고 있어야 하는 일 따위이다.

 

사소한 것과 그렇지 않고 특별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의 위치는 언제든 뒤바껴질 수 있는 것이며 소중함의 무게를 달자면 그 경중을

가리기가 몹시 어렵다. 나는 사소한 것의 소중함에 무게를 둔다.

 

아무려나 주점 밖에서는 젖은 포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소리가 잦았고 텔레비전에서는 불꽃축제의 뻥뻥거리는 소리가 컸으며

내 입에서는 아사삭하는 소리가 흔했다.

 

동시에 빈병도 늘어났다.

 

 

 

3. 비를 맞으며 거리로

 

비를 맞으며 거리로 나섰다. 술병을 얻었으니 몸져 누울 집으로 갈 시간이다. 차를 기다리는데 육교 밑으로 십년전 십일년전 십이년전

내모습이 흐리게 지나갔다.

 

겉멋에 잔뜩 절어 입에는 담배, 한 손은 바지주머니에, 옆에는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며 방자한 팔자걸음을 하고 있는 나를

내가 불러세우고 싶었다.

 

손에 잡히지 않고 멀어져 가는 나에게 나는 속삭였다.

 

잘가라, 청춘.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