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남해, 윤슬
동해가 사람을 압도하는 바다라면 남해는 호수와 흡사한 바다입니다.
서해는 있는 듯 없는 듯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다가와서 선물을 툭 던져주고 느닷없이 내빼버리는 부끄럼이 많은
친구와도 같은 바다입니다.
시월은 남해.
넉넉한 호수를 닮은 그 바다를 향해 자전거를 싣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사천에서 내려 삼천포,창선대교를 지나 남해를 둘러볼 요량이었습니다. 맨 뒷자리 중년여성 둘은 차부에서 버스가
시동을 걸기 바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타면 잠을 못자는 나는 그녀들이 인관관계에서 겪은 곡절의 전부와 불륜으로밖에 판단이 안되는 남자친구와의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에 내내 시달렸습니다.
나라의 도덕은 가정주부가 남자친구와 다툰 이야기를 공공장소에서 떠벌거려도 크게 흉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나
봅니다.
더 심한 소리를 듣기 전에 다행히 나는 중간 기착지인 사천에서 내렸고 둘은 삼천포로 갔습니다.
사천의 들과 밭이 자전거 여행자의 뒤숭숭한 마음을 정화해주었습니다. 허술한 허수아비가 반가웠습니다.
영악해져버린 참새떼에겐 아무런 경계가 되지 않을 테지만 기능이 마비되었더라도 때가 되면 시간을 내어
형식을 따르는 것이 마음 착한 사천의 농부들이 누리는 마음의 여유이고 놀이입니다.
이건 광의의 창작이고 예술행위입니다.
쌍팔년도엔 온 들에 호돌이 인형이 허수아비를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누여놓고 들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좀 공격적으로 발을 굴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락을 까먹고
있던 참새떼가 후두둑 공중으로 비상하였습니다.
나라의 형편이 좋아졌으니 참새가 먹는 건 그냥 넘어갈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 보기에 좋았습니다.
한글날을 기념해서 내걸은 국기가 인상적입니다.
삼천포에서 남해를 잇는 연육교가 생기고 나서 기존의 남해대교보다 더 인기가 있는 길이 사천에서 남해로 가는 길입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관광안내 간판까지 내걸렸으니까요.
멀리 삼천포항구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냥 삼천포항구 근처 오뎅집에서 부풀대로 부푼 오뎅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릴까.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에 벌렁 드러누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회원으로서의 의무나 다 할까.
혼자 허공에다 공을 뿌리고 냅다 뛰어 반대쪽에서 손에 없는 방망이를 흉내만 내어 받아치고 일루로 이루로 삼루로
그리고 홈으로 슬라이딩.
다음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들고 삼천포에 들러야겠습니다.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고요. 밤엔 경관조명까지 더해져서 그 풍광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더 생기면 이렇게 쫒기 듯 하는 여행 말고 지긋이 묵어가면서 남해의 전부를 느끼고 싶습니다.
대교 중간쯤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바짝 마른 수수깡의 모습과도 같았던 도보여행자의 가방은 몹시 볼품없고 작았습니다.
호수와 흡사한 바다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나요? 남해는 바다와 삶이 멀지 않고 밀착될대로 밀착되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심코 바닷물을 퍼마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가파른 동해의 벼랑끝에서 무섭게 닥아세우는 파도를 평생 마주하고 산 사람의 마음과 창문을 열면 언제나
그렇게 퀘퀘한 색으로 데면데면 다가오는 바다가 일상이었던 사람의 마음은 확연히 구분이 되겠죠.
두 바다 중에 선택을 하라면 일단 동해와 서해를 다시 다녀와 보고 결정해야겠습니다.
아, 제주의 바다도 선택지 중에 하나.
남해는 의외로 넓습니다. 해서 많은 풍경을 담고 있죠.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합니다.
긴 산허리에 걸린 길을 넘어가니 갯벌이 있었습니다.
이래서 남해를 보물섬이라고 하나봅니다. 한굽이 지나면 또다른 볼거리를 던져주고 있으니까요.
살아있는 갯벌에 체험학습 나온 아이들과 가족들이 평화로운 휴일의 한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억을 쌓은 아이들의 삶은 훗날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앞은 바다 뒤는 논과 밭 중간에 갯벌.
남해의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이 부족할 것 없는 자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원시상태 그대로의 수렵채취 현장에 취해 카메라를 놀리는 손이 바빴습니다. 어설픈 나의 눈에도 참게 한마리가
포착되었습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게는 죽자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게의 모습을 추적하다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가 도망간 방향은 시월의 한풀 죽은 태양이 마지막 오기를 부리고 있는 각도.
그곳에서 나의 눈을 파고든 빛의 잔꽃송이.
윤슬.
어쩌자고 모국어의 선조들은 이 하찮은 빛에도 이름을 붙여놓았던 것인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슬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몇번이고 윤슬, 윤슬, 윤슬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크게 가망은 없지만 내게 딸아이가 생긴다면 이름을 윤슬이라고 지을 것입니다.
남해 갯벌의 윤슬을 뒤로 하고 나는 자전거의 방향을 미조로 돌렸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