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책읽기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다, 라는 말이 있다. 어떤 책이 잘 팔리고 있을 때를 비유할 때 쓰는 문장이다.
책이 잘 팔리면 종이값도 덩달아 오르기 마련. 문화유산답사기로 한양의 지가를 올렸을 법한 그가 돌아왔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나라의 문화재의 격과 국내여행의 품위를 동시에 한차원 높여준 책임에 틀림없다.
전작과의 차이라면 문장이 조금 부드러워졌으며 각각의 꼭지마다 저자에게 번득하는 깨달음을 일깨워준 상수(上手)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이 학자 입장에서 하나라도 읽는이에게 더 전달하려고 애쓰는 카랑카랑한 훈장님의 글냄새가 났다면
근작은 학자에서 행정가로 이제는 작은 시골에 정착해 밭을 일구는 초로의 어르신 신분으로 돌아와 은근짜를 놓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듯하다.
좋은 것을 그냥 좋다, 라는 한마디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좋은 것인지 조목조목 학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일깨워 줄 수있는 그의 능력은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그냥 흘려넘기기 쉬운 것도 그것에 깃든 아름다움과 사연을 찾아내 전달하는 능력도 또한 그러하다.
거기에다 긴 세월 현장을 답사한 공력에 문화재청장으로서의 행정경험은 이번 시리즈뿐만이 아니라
다음 책에서도 내용을 더 풍성하게 할 것이다.
배 깔고 엎드려 책장을 넘기면서 그의 길을 자전거를 타고 마음으로나마 동행해 본다.
요즘은 그런일이 뜸하지만, 나는 비슷한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 일이 있다. 내용이 좀 하품나지만 대충 이렇다.
열다섯살의 내가 스페인의 어느 허름한 부두가에서 나무상자에 등을 기대고 배를 바라보고 있다. 배는 대항해를
위해 갓 출발을 했고, 친구들은 그 배 위에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한국인인 내가 스페인이라는 지역도 앞뒤가 안맞지만 역시 꿈이니 그냥 넘어가자. 꿈은 입은 옷가지라던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따위에 차이만 있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미지의 대륙을 향해 떠나는 친구들의 모습에는 언제나 흥분으로 들떠 홍조가 가득하고 범선의 위용은 화려했다.
그렇게 배가 멀어지고 나면 떨어지는 해를 등지고 언제나 나만 혼자되어 부두에 남아 있는 거였다.
꿈속의 그 대항해 시대에는 무슨 일이...
꿈이지만 그 친구들의 미래에는 어떤 일들이...
꿈도 꿈이지만 솔직한 이야기는 [대항해시대]라는 롤프레잉 게임을 다시 한 번 하고 싶다는 욕심이
책을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미리 말하지만, 책은 두껍고 어느정도 전공지식이 없으면 잘 읽히지 않을 수 있다. 주경철 교수의
오랜 연구의 결과물 앞에 나는 기가 질렸다.
책은 당시 시대상과 더불어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대항해시대를 설명하고 있다. 덧붙여 당시 배에 올랐던
선원들의 운명과 해적들의 다양한 면모도 서술하고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항해의 성공과 선원의 생존률이 비극적이라고 할만큼 형편없음을 확인하면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꿈속의 내가 배를 타지 않은 것은 결국 잘한일?
글쎄...
다음번 꿈에 다시 스페인 땅 그 부두가에 떨어진다면 친구들의 손을 잡고 배에 올라 같이 대항해를 떠날 것이다.
아직도 소설 따위를 읽고 있냐? 하는 핀잔을 가끔 듣는다. 그런 핀잔을 주는 사람이 운영자의 책을 빼앗아
한 두장 읽어보고는 하는 말이 도대체 소설이 왜 이따위로 재미가 없냐? 한다.
소설이 재밌으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의무는 아니다. 재미의 기준을 정할 수 없어서 그점도 어렵다.
전달하는 정보의 양도 인터넷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치고받는 재미도 없는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아래의 문장을 이 소설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우리는 지금 중대라고 하지만 오십 명뿐입니다. 적의 대부대는 다시 이 고지를 빼앗으러 올 것입니다.
우리도 빼앗았으니까 적들도 빼앗겠지요. 우리는 지금 참호 속에서 거총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적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풀 먹인
여름옷을 입고 싶어요.' -내 젊은 날의 숲- 158쪽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앞 전투현장에서 작성된 3사단 학도병의 편지를 작가가 소설에 인용한 것이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상추쌈과 여름옷이 간절한 어린 병사와 그 편지를 받아들었을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겹다.
전쟁의 비극이나 삶의 소중함을 이렇게 강력하고도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아직 소설에는 있다.
소설이 내게는 큰 위로를 준다.
이 여름도 견뎌낼 거다. 책을 읽으면서...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