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풍정
긴 터널을 지나면 꽃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창원에서 내려 자전거로 진해를 향해 달려가는데,
이 비밀스러운 도시는 긴 오르막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였습니다. 터널을 달릴 때면 왜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자전거로 통과해 본 사람만이 아는 일입니다. 터널 내벽에 되튀기며 곧장
달겨드는 자동차의 소음은 자전거 타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니까요.
저 멀리 한 점 밝은 빛이 점점 커지고 무서운 소리로의 공포에서 곧 해방되겠다, 안도하는 순간
작았던 원은 금새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내리막의 즐거움을 맛보려고 하다가
자전거 타는 이는 이내 브레이크를 잡으며 속절없이 얼어버리고 맙니다.
아!
꽃의 나라.
봄이라는 계절의 진해는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친 여행자에게 와락 달겨드는 거였습니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드라마 로망스의 배경이 되었던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봅니다.
미소 하나만으로도 소녀들의 가슴을 여럿 죽여버린 살인미소의 소유자 김재원의 모습과
코맹맹이 김하늘의 어여쁜 머릿결이 중첩되며 지나가는데, 여행자는 손에 든 포카리 스웨트를
오래 만지작거리고 앉았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진해여고 발랄한 여고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고,
하얀색 제복이 정말 멋들어지고 늠름하기가 이루 표현하기 힘든 바다의 신사 해군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지나가는 코가 높은 외국인에게 한마디 합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 해군이요. 멋지지 않소?
외국인은 나의 수준 떨어지는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고는 빙긋 웃습니다. 영어는 어릴 때 좀 열심히 공부해 둘 걸...
구석구석 손님을 맞이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진해를 자전거로 차근차근 둘러보는데
진해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진해 사람들은 아침에 세수하려고 물을 대야에 떴는데, 그 위로 벚꽃의 꽃잎이 후두둑 떨어지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곳은 담장과 벚꽃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벚꽃의 터널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작은 돌다리 위에 다시 섰습니다. 바람이 불고 꽃잎은 비처럼
떨어지는데, 나는 괜히 마음이 울컥하여 얼른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구석으로
숨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허겁지겁 온통 꽃 난장인 진해를 도망치듯
빠져나오고 맙니다.
올해에도 꽃은 피겠죠? 벚꽃을 구경 가실 요량이면 혼자서 가지 마세요. 떨어지는 꽃잎에 마음을
다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4 년전에 써두었던 글에서.
올해에 다시 들렀더니 꽃도 나라 분위기를 타는지 채 피지 아니하였습니다.
6년전만해도 흐릿한 하수가 흐르던 곳이 이렇게 단장 되었네요.
진해에 오면 꽃만 죽자고 보다가 이번에는 그냥 영판 내내 하릴없이 진해여고, 내수면연구소, 생태공원을
어슬렁거렸습니다.
건널목에서는 진해의 고등학생들이 수신호에 맞춰 하나 둘 어서 건너가십시요! 하며 명랑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예전 교련복이 아니라 나름대로 멋을 부린 교복에 귀걸이를 한 남학생과 깡총한 치마가 어여쁜 여고생들.
의무감에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진해에서 태어나 진해의 꽃과 바다를 보며 자라다가 바다에 취해 꽃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는 삶은
지극히 복됩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이르다면 그것이 아쉬울 뿐.
진해는 꽃처럼 사라져간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바다에서 침잠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럼.